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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소개


 

 김수로왕릉 주소지: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312

 


가락국


기본정보


기원전 42년부터 562년까지 영남의 낙동강 중, 하류를 중심으로 위치한 여러 소국에 대한 명칭


일반정보


가락국은 영남의 낙동강 중, 하류를 중심으로 주로 낙동강 서안에 위치한 여러 소국을 말하며 기원전 42년에 건국되어 56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해 명망하였다.


전문정보


가락국은 영남의 낙동강 중, 하류를 중심으로 주로 낙동강 서안에 위치한 여러 소국을 말한다.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 조에는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後漢 世祖 光武帝 建武 18年 壬寅 三月)”, 즉 기원전 42년에 건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왕력에서는 “가락국은 또한 가야라 한다(駕洛國[一作伽耶])”이라 하여 가락국과 가야가 동일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가야의 변천사를 요약해 보면 태동기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으로 부족국가시대이고, 성립기는 1세기에서 2세기경으로 도시국가시대이다. 발전기는 3세기경에서 5세기 말엽으로 영역국가시대이며 쇠퇴기는 6세기 초엽에서 중엽 멸망까지이다.


그리고 가락국은 많은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 큰 세력을 가진 국가는 5, 6개국 정도였다. 소국들은 소규모의 독립국가로 이들 5, 6개 국가 주위에 인접해 있으면서 큰 국가를 중심으로 몇 개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유지되어 왔다. 이 때 형성된 세력권은 김해나 웅천 중심의 본가야권, 고령과 대구 중심의 대가야권, 함안·진해·창원·칠원 중심의 아라권, 충무·고성·거제 중심의 소가야권 등이 있었으며 이 중에서도 더욱 큰 세력권은 본가야권과 대가야권, 아라가야권이었다.


가야 제국(諸國)들의 전체적인 강역은 동쪽의 경우 의성, 대구, 경산, 양산 일대이고 서쪽은 지리산, 남쪽은 창해이며 북쪽은 문경지방으로 상정할 수 있다.(윤석효, 1985)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앞서 각 국가의 명칭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① 구야국, 구야한국(狗邪國, 狗邪韓國)

『삼국지(三國志)』에는 변진(弁辰) 12국의 하나라 구야국을 전하고 왜인전에는 구야한국으로 전하고 있다. ‘구야’는 ‘가야’와 음이 가깝기는 하지만 ‘구’를 ‘가’의 음차(音借)호만 볼 것은 아니다. 김해지역의 향언(鄕言)에서는 구지봉을 개라봉이라 부르고 있다. 개라봉은 가라봉으로, 김해지역에서 ‘가’는 ‘개’로 발음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개’에 대한 훈차(訓借)로서 ‘구’가 『삼국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구야국은 다름 아닌 가야국을 기록한 것이 된다. 


② 가야국(加耶國)

『삼국유사』에는 가락국기의 한 예에 국한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비교적 빈번하게 보이는 사례이다. 신라의 외교상대로서 또는 복속에 관련되는 내용의 서술에 사용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국(國)’을 붙이지 않은 많은 용례의 가야가 보이고 있지만 신라와의 전쟁을 전하는 기술들에서는 가야병(加耶兵), 가야적(加耶賊), 가야인(加耶人)과 같이 사용되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삼국사기』가 왜(倭)에 관한 사실을 전할 때 외교기사에서는 왜국(倭國)으로 표현하다가 전쟁기사에서는 왜병(倭兵), 왜구(倭寇), 왜인(倭人)과 같이 기술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용례이다.


③ 가락국(駕洛國)

『삼국유사』에 채록되어 있는 「가락국기」는 『삼국사기』에 앞서 편찬되었던 것으로, 가락국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한국의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가락국기」는 가락국에 대한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하겠다는 의식에서 편찬되었다. 서술대상의 명칭에 대한 생각은 단편적 사실만을 전하는 다른 사서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가락국기」는 수로왕이 나라의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가락은 가라의 나라 중에서 큰 세력이었다는 역사와 자존의식의 반영이다.


④ 임나(任那)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임나가라(任那加羅), 『삼국사기』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 「봉림사진경대사탑비(鳳林寺眞鏡大師塔碑)」의 임나왕족(任那王族) 등과 같은 우리의 문자기록에도 보이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주로 사용되었고 아주 빈번하게 보이는 명칭이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한남부, 가야제국, 가락국이나 대가야를 가리키는 세가지 용례가 있고 우리의 문자기록에서도 반드시 가락국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⑤ 수나국(須那國)

『일본서기』에 보이는 명칭으로 ‘쇠나라’로 읽히고 있다. 가락국에서 생산되던 쇠를 수입해 가던 일본열도의 왜인들에게 익숙하였던 명칭이었을 것이다. 철의 생산과 관련되는 가락국사의 단면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용례이다.


⑥ 금관국(金官國)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금관국 수로왕(金官國 首露王)의 용례와 같이 아주 이른 시기의 기사에서 그 용례가 보이고 있다. 물론 金=쇠의 어원을 갖는 것에는 이론이 없겠으나 『삼국사기』법흥왕 19년조에 보이는 금관국주(金官國主)의 투항기사와 같이 가락국의 멸망기 혹은 멸망 후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김유신비문(金庾信碑文)」을 인용한 『삼국사기』의 김유신전(金庾信傳)에서 가락국이 처음에는 국호를 가야(加耶)라 하였다가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고 전하는 내용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에서 가락국을 남가야(南加耶)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령의 대가야를 북가야(北加耶)로 의식했던 때문으로 여기에 포함되었던 금관국의 용례에는 대가야를 병합했던 신라인의 역사인식이 개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이영식, 2000)


가야의 국가체제로서의 관료기구와 신분제도를 보면 금곽국의 경우 중앙관료기구가 매우 세분되어 있었다. 천부경(泉府卿)과 사농경(司農卿)의 존재는 재정에 관한 일을 맡았던 중앙관청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종정경(宗正卿)의 존재는 왕실계통의 일을 맡아본 중앙관제까지 정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왕실창고인 내고(內庫)가 있었는데 이것은 국가재정을 관리하는 관청과 왕실재정을 관할하는 관청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야는 스스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제도도 갖추고 있었다. 부대의 편성은 일반부대의 경우 보병과 기병, 그리고 특수부대로서는 궁병대가 있었다. 이들 부대의 지휘는 대도(大刀)를 지닌 신분계층이 통솔하며 이끌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부대를 구성했던 병사들은 대부분 부역에 동원되었던 양인들이었으며 보조원으로 노비들이 참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가야에서 무기로 생산되었던 대도와 창, 모(矛), 궁(弓), 시(矢) 등은 왜지에까지 전파되어 왜국의 공격용 무기 개발에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5세기 이후 기마전술도 왜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볼 때 가야의 무기 생산기술과 기마전술이 매우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가야 제국 주의의 강력한 국가인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6세기 중엽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제도와 군사제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 제국 형성의 원동력은 정치적, 군사적 측면 이외에 사회의 하부구조인 경제적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가야의 산업으로 우선농업을 들 수 있다. 가야 제국은 낙동강 본류와 지류 유역에 펼쳐진 충적평야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수도경작에 적합한 평야지대이다. 그러므로 가야에서는 농업이 발달하였고 특히 벼농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가야는 한국의 곡창지대로 유명하며 금관가야국 역시 김해평야에서의 풍요로운 농산물의 부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가야지역은 철산자원이 풍부하고 철제기술이 발달하여 철기의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는데 이를 더욱 촉진시킨 것은 초강법의 개발이었다. 초강법에 의한 철생산량은 막대한 양의 농기구를 생산하여 농산물의 획기적이며 비약적인 생산을 가져오게 했다. 또한 무기의 대량생산도 이루어져 여러 병종의 부대가 편성될 수 있었으며 대규모의 병력동원과 전투규모의 확장도 가능하였다. 따라서 가야는 외적으로부터 각자의 영역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복전쟁도 전개할 수 있는 고대국가 수준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결국 가야의 제철업은 개발의 중추이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가야의 고고학적 유물 중 토기와 관모(冠帽)는 가야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가야토기는 생활용구와 의전기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도질토기에서는 아름다운 장식과 탁월한 기교의 제작수법 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에 의한 주술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거나 제사에 따르는 공헌적인 기형, 기내(器內)에 게와 패류 같은 식료가 담겨져 있는 것 등은 이 당시 토기의 용도 뿐만 아니라 생활상까지 알 수 있게 하였다. 고분에서 출토된 차형(車形) 토기와 주형(舟形) 토기는 그 형태를 통하여 당시 수레와 선박이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가야는 토기의 제작기술면에서 신라와 대등한 수준을 나타내고 있으며 제사의식과 주술적인 신앙, 식료품을 통한 그들의 생활상 그리고 운송수단이 발달한 나라였다.


관모가 출토된 고분은 대체로 구릉의 경사면에 축조되어 가야 제국의 구영역 내에 산재해 있다. 가야의 관모는 고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관모의 시원형(始原形)형식으로 신라 고분 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또한 관모의 제작은 철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철기를 만드는 제작기술이 발달하여 축적되는 동시에 금과 동을 다루는 수공업 기술도 발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기술은 전문수공업자들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들은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가야사회를 구성하는 한 부류였다.(윤석효, 1985)


참고문헌


윤석효, 1997,『가야사』, 혜안.

이영식, 2000,『가야 각국사의 재구성』,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駕洛國 [一作伽耶 今金州]

가락국 [또는 가야라고 하니 지금의 금주이다.]


김해김씨내력도

 

金海金氏 三賢世家上系圖


太祖大王 金首露王·許王后 서기 42년 3월 건국

2대왕 道王(居登王) 왕의 2세손 수로왕 158세 서거

3대왕 成王(麻品王) 왕의 3세손 가락국 (491년)

4대왕 德王(居叱彌王) 왕의 4세손

5대왕 明王(伊尸品王) 왕의 5세손

6대왕 神王(坐知王) 왕의 6세손

7대왕 惠王(吹希王) 왕의 7세손

8대왕 莊王(銍知王) 왕의 8세손

9대왕 肅王(鉗知王) 왕의 9세손

10대왕 讓王(仇衡王) 왕의 10세손 서기 532년 신라국귀속

武力(무력) 왕의 11세손 신라국 장군

舒玄(서현) 왕의 12세손 신라국 장군

興武大王 庾信(유신) 왕의 13세손 서기 673년 7월 별세

三光(삼광) 왕의 14세손

允中(윤중) 왕의 15세손

長淸(장청) 왕의 16세손

雄元(웅원) 왕의 17세손

擎柱(경주) 왕의 18세손 參判公派組

成海(성해) 왕의 19세손

挺喆(정철) 왕의 20세손

琇胤(수윤) 왕의 21세손

天授(천수) 왕의 22세손

商佐(상좌) 왕의 23세손

浩(호) 왕의 24세손

華齊(화제) 왕의 25세손

振酉(진유) 왕의 26세손

承意(승의) 왕의 27세손

天精(천정) 왕의 28세손

恒齡(항령) 왕의 29세손

洙聖(수성) 왕의 30세손

商欽(상흠) 왕의 31세손

成雨(성우) 왕의 32세손

一曙(일서) 왕의 33세손 三賢

匡國(광국) 왕의 34세손 節孝 - 克一

宗栢(종백) 왕의 35세손 濯纓 - 馹孫

繡(수) 왕의 36세손 三足堂 - 大有

以琢(이탁) 왕의 37세손

瑞天(서천) 왕의 38세손 金海金氏 148派 중 金庾信 系列 3個派

陽喆(양철) 왕의 39세손

是秋(시추) 왕의 40세손

鎭國(진국) 왕의 41세손

奎祥(규상) 왕의 42세손

道浹(도협) 왕의 43세손

湯雨(탕우) 왕의 44세손

萬瑞(만서) 왕의 45세손

師孟(사맹) 왕의 46세손

相宙(상주) 왕의 47세손

龍直(용직) 왕의 48세손

中祖 管(관) 왕의 49세손 三賢派 1세 版圖判書公

文淑(문숙) 왕의 50세손 관의 2세손

伉(항) 왕의 51세손 관의 3세손

湑(서) 왕의 52세손 관의 4세손

克一(극일) 왕의 53세손 관의 5세손 節孝公

孟(맹) 왕의 54세손 관의 6세손 執義公

駿孫(준손) 왕의 55세손 관의 7세손 燕川君

大雅(대아) 왕의 56세손 관의 8세손 縣監

錡(기) 왕의 57세손 관의 9세손

致鳳(치봉) 왕의 58세손 관의 10세손 入鄕祖 1세

彦慶(언경) 왕의 59세손 관의 11세손 2세손

繼祥-鳳祥 왕의 60세손 관의 12세손 3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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